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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전시회_ 디자인, 일상속의 경이


 김춘환은 현대 사회에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들을 싣고 있는 잡지나 홍보물, 전단지, 엽서 등의 정보지를 모아 비정형의 형태로 접어 일정하게 잘라내어 나무패널에 붙이거나 스테인레스 통에 집어넣어 평면 혹은 설치로 작업한다. 다양하게 접은 종이는 톱으로 잘라 그 단면을 단순한 추상 형태로 붙여나간다. 결국은 인쇄된 종이는 터치와 색채라는 질료를 대신해 선, 면, 원의 단순한 형태를 일정한 리듬 안에서 몰입과 확장의 변화를 주고 있다.

폐지의 재활용이란 재료의 탐구는 환경이 화두인 이 시대의 문제의식을 가진 사회참여작업일 뿐만 아니라 평면과 입체의 새로운 조형적 실험이기도 하다.

 

연필

1565년 납처럼 생긴 끈적거리는 검은 물질이 영ㅇ국 컴벌랜드 주 언덕의 뿌리 뽑힌 나무 밑에서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엉성한 나무 막대에 끼워서 지울 수 있는 표실을 하는데 사용했다. 18세기 후반 스웨덴의 화학자 카를 빌헬름 셀레는 그 물질이 탄소결정체라는 것을 알아냈고, '필기하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graphein에서 graphite(흑연)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 1760년 뉘른베르크 근처에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세운 독일의 가구상 카스파르 파버가 1761년 최초로 연필 상점을 열었다. 그가 만든 최초의 연필은 흑연과 황을 섞어 만든 얇은 막대를 나무 조각 두 개 사이에 끼우기 전 단계에서 흑연과 점토를 가열해 우수한 합성물을 개발했다. 이 혁신은 효율적인 제조공정뿐 아니라 흑연의 강도를 다양하게 조절하는 데 기여했다.파버 회사는 계쏙 가족이 경영했다. 1839년 카르파르의 증손자 요한 로타르 파버가 처음에는 수력, 나중에는 증기를 이용해 연필 생산을 기계화했고, 공장에서 나오는 모든 연필에 'A.W.파버'라는 라벨을 붙여서 브랜드시장을 선도했다. 그는 1840년 세계 최초로 육각형 연필을 개발했고, 1856년에는 동부 시베리아의 우수한 흑연에 대한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앞서 에버하르트 파버는 1851년 뉴욕에 최초로 기계화된 연필 공장을 세웠다. 이후로도 연필 생산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수백 년 묵은 원래의 디자인은 변화하지 않았다.

 

큐 팁스

아내가 이쑤시개에 솜뭉치는 붙여서 아기의 귀를 닦는 것을 보고 면봉을 착상하게 된 레오 저스텐장은 1923년에 레오 저스텐장 인펀트 노블티 컴퍼니를 설립했다. 면봉은 간단해 보이지만, 디자인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무엇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에 사용한 나무 막대는 갈라질 위험이 있어서 마분지와 유사한 하얀색 소재로 교체되었다. 면봉의 양 끝에 똑같이 부터있는 솜이 귓속에 떨어지거나 끼이지 않도록 하는 것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제품은 처음에는 베이비 게이스로 불렸지만,1926년에 큐 팁스 베이비 게이스로 바뀌었고, 그 후에 다시 큐 팁스로 바뀌었다. 큐 팁스에서 큐는 품질을 의미하고 팁스는 막대기 끝에 붙어있는 솜을 나타낸다.

 

시리즈 가위

너무나 당연하지만 또 얼마나 독창적인가, 다양한 크기의 손잡이를 가진 가위라니! 종종 최고의 디자인은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를 관찰하는데서 탄생한다. 직물을 가지고 작업하는 장인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가위를 사용해왔다. 피스카르스의 책무는 이와 같은 평범한 진리를 산업 시대와 일반대중의 상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1958년 나무 조각에도 일가견이 있던 핀란드의 기술자 올로프 벡스트룀은 피스칼스의 산업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업무인 식기류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그는 가위와 절단기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피스 카르스를 세계적인 브랜드의 반열에 올려놓게 될, 그리고 끊임없는 모방의 대상이 될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나무 조각가로서의 그의 능력이 마치 하나의 유연한 조각 같은 손잡이를 탄생시켰고, 곧 완전 자동화된 사출성형 공법으로 손잡이는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토블레로네

1899년, 스위스 베른에서 조그만 제과점을 운영하던 요한 아코프 토블러는 세 아들과 함꼐 초콜릿 공장을 세웠다. 1908년에 그들 중 한 명인 테오도어 토블러는 사촌이자 생산관리 책임자인 에밀 바우만과 함께 프랑스에서 들여온 일명 몽텔리마르 누가를 가지고 실험에 착수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밀크 초콜릿, 꿀, 아몬드가 적절히 배합된 토브레로네 바 제조법을 완성했다. 1909년 토블레로네는 아몬드와 꿀이 들어간 최초의 밀크 초콜릿으로 첫 번째 특허를 받았다. 곧 이어서 이름, 포장을 비롯해 토블레로네의 상징인 삼각형 모양에 대한 상표 등록을 마쳤다. 토블레로네는 그들의 성 '토블러'와 꿀, 아몬드를 주재료로 하는 이탈리아의 누가 '토로네 torrone'를 합친 합성어이다. 토블레로네의 특이한 모양에 대해서는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유명한 봉우리 중 하나인 마테호른을 본뜬 모양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편 토블러가 파리에 가면 꼭 들르던 뮤직홀 폴리베르제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쇼의 마지막을 자익하던 무용수들의 인간 피라디으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모양의 기원이 무엇이든 토블레로네의 작은 삼각형은 쉽게 쪼개 먹을 수 있는 편리함과 재미를 통시에 제공하여 그것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밴드

존슨 & 존슨의 탈지면 구매 담당자인 얼 딕슨은 요리만 했다 하면 손을 베이거나 화상을 입는 아내 조세핀과 함께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조세핀이 상처를 입었을 때 손쉽게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 붕대를 잘라두어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먼저 붕대를 작은 네모 모양으로 자른 다음 접착력이 있는 기다란 반창고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붙여나갔다. 그리고 세균 번식을 막기 위해 붕대 위에 크리놀린을 덧입혔다. 그는 상사에게 이 발명품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고, 얼마 후 그 접착 붕대를 상품화하라는 제임스 존슨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름은 그 유명한 밴드에이드로 정해졌다. 얼은 단숨에 회사의 부회장이 되었다.

밴드에이드는 모든 이들의 필수품이 되었고, 하나의 상품명을 넘어 일반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는 1956년에 처음 등장한 예쁜 그림이 그려진 것에서 항생 처리가 된 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 다양한 크기의 밴드에이드가 생산되고 있으며, 총 생산개수는 1천억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덤스 추잉껌

 

1848년에 미국인 존 커티스가 추잉껌을 발명했다. 고대 마야인이 사포딜라나무 추출액으로 만들던 치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한편 북비 대륙의 토착민에게도 가문비나무 추출액을 이용해서 만든 껌이 널리 퍼져 있었다. 19세기 중반 무렵 커티스는 맛을 가미한 파라핀 껌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186년 스태튼아일랜드에 있는 사진가 토머스 애덤스의 집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멕시코의 독재자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아나 장군이 애덤스에게 치클을 소개했다. 그리고 치클을 고무와 섞어서 좀 더 상품성 있는 제품을 만들어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자동차 바퀴라도 만들어낼 것 같던 애덤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애덤슨느 남아 있던 다량의 치클을 이ㅡ트리버에 던져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던져버리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한 소녀에게 뛰어가 맨해튼의 챔버스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에 있는 한 약국에서 파라핀 1페니 어치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드디어 치클로 만든 껌이 탄생했다. 1871년 2월 뉴욕의 약국에서 색색의 얉은 종이에 싸인 자그마한 치클 조각이 '애덤스 뉴욕 껌 NO.1'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가격은 한 조각 당 1페니였다. 지금처럼 완전하게 맛이 가미된 껌이 나온 것은 1880년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팝콘 판매상으로 일하던 윌리엄 J.화이트가 이룬 혁신이었다. 1899년 그가 아메리칸 치클 컴퍼니 회사장직에, 토머스 애덤스 주니어가 이사회 회장직에 올랐다.

 

슬링키

기계 공학자 리처드 제임스가 슬링키를 발명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가 필라델피아 크램프 조선소에 있는 작업장에서 비틀림 용수철을 가지고 일하고 있을 때, 높은 선반에서 용수철 하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졌을 떄 그대로 멈추거나 출렁거리기만 하는 인장 용수철과는 달리 비틀림 용수철은 선반에서 책으로 탁자 위로 바닥으로 이리저리 튕겨 가며 계속 움직였다. 리처드는 이 용수철을 아내 베티에게 보여주었고, 부부는 움직이는용수철로 장난감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리처드는 철사의 가장 적절한 두께와 비율을 알아내기 위해 2년을 보냈다. 그 동안 베티는 적당한 이름을 찾아서 사전을 샅샅이 뒤졌다. 살금살금 매끄러운 꾸불꾸불한 등의 듯을 아우르는 단어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슬링키였다. 1945년 그들은 5백 달러로 제임스 인더스트리즈를 창업하였고, 지방의 기계 공장에서 슬링키 4백개를 제작해 크리스마스 쇼핑 기간 동안 필라델피아 짐벨스 백화점에 선보였다. 진열창 안에서 경사대를 내려가는 슬링키를 시연해 보이자, 리처등게 부타을 받은 친구가 첫 번째로 슬링키를 구입했다, 시연이 계속된 90분 동안 슬링키 4백 개는 모두 팔렸다. 1956년에 제임스 스프링 앤드 와이어가 설립되었고, 시장에 나가는 모든 슬링키는 리처드 제임스가 설게한 고유의 장비로 제작되었다. 리처드는 약 18.6미터의 철사로 고일 80개를 만들어내는 기계를 개발해서 10초마다 슬링키 한 개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리처드는 볼리비안 컬트에 합류하기 위해 아내와 자녀 여섯 명을 떠나 버렸다. 그 후 늘 두뇌 역할을 맡던 베티가 최고 경영자가 되어 회사를 이어 받았다. 베티는 회사를 현재의 위치인 홀리데이즈버그로 옮겼고, 원래 사용되던 파란색과 검은색 스웨덴산의 강철은 미국산 은색 금속으로 대체되었다. 1943년 이래로슬링키를 만드는데 쓰인 철사를 합치면 지구를 126바퀴나 감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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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예술의 전당 전시회를 갔다와서_디자인 일상 속의 경이

 

디자인은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옷, 타이포그래피, 포스터,일러스트레이션,제품디자인, 그릇 귀걸이..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제품은 디자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디자인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난 디자인을 '창조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상속의 디자인전에는 이제 우리 주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위대한 디자인이라 칭하며 전시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위나 젤리빈 볼펜 연필 그리고 콘돔에 이르기까지.

전시회를 쭉 돌아보면서 난 의문점이 생겼다. 전시회장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떡하니 자리잡으며 쉽사리 사람들이 손대지 못하는 희소성을 지닌 작품들이 위대한 디자인인가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좋은 디자인인가? 사실 이 두가지 문제를 놓도 어떤 것이 훌륭한 디자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에 없었던 것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에 가치를 두어 말하고 싶다. 사실 새롭게 발명된 유용한 것들은 디자인이라기보다 발명품에 가깝다. 그것에 디자인적 가치가 부여되기 위해서는 실용성과 더불어 미적 창조적 감각이 돋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그것은 창조적 발명품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용품으로 자리 잡게 된다. 디자인은 그것이다. 예술품이 희소성의 가치를 지니고 그 하나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특성을 지닌다면 디자인은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특성을 지닌다. 디자인이 상업성과 연결되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