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Vie&Philosophy

<영화>pina_'몸의 언어'을 깨워라!






다큐멘터리  2012 .08 .30  104분  독일  전체 관람가
감독
빔 벤더스
출연
피나 바우쉬, 부퍼탈 무용단원들, 말루 에이로도, 메크틸드 그로스먼 

 

'언어'가 인간의 모든 사고를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태초에 지니고 있었던 '몸의 언어'를 상실하고 살아왔다. 여기 그 잃어버렸던 언어를 다시 일깨워주는 영화가 있다.피나 바우쉬의 대표작 4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 영화는 우리가 늘상 행하는 일상적 몸집부터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충동과 억제를 넘나들며 그녀가 일생동안 담배와 와인을 벗삼아 추구했던 예술적 세계를 생동감있게 보여준다.





 이미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고 느끼기에 익숙해져버린 나에게 그녀의 춤은 매우 난해하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그녀의 춤을 계속 접하다보면 내가 느끼지만 말로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내적인 감성과 생각들이 또다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원시적인 인간의 본능을 느끼게 해주는 '봄의 제전'은 정신의 숭고함이 아닌 육체의 강인함과 그 안에 내제된 본능적인 두려움을 보여준다.  '카페 뮐러'는 타인에 의해 조작되고 변형되는 인간의 감성과 이로인한 공허함과 불안함, 너과 나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음을 무용수들은 감은 눈와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또다른 눈으로 표현한다. 카페 뮐러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여성과 남성이 포옹을 하고 있으면 한 남성이 그것을 억지로 다른 포즈로 변화시키고 그것이 계속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자발적인 행위와 비자발적인 행위, 불규칙한 행위에 부여된 무언의 규칙성, 타인에게 의존하는 육체 이 모든 것이 뒤엉켜 무의미해보이는 동작들이 하나의 춤으로 변화된다.  개개인마다 가기 다른 사건과 감정들로 점철된 인간의 삶이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로 응축된 춤으로 전환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의 보편적이고도 특수한 지점을 깨닫게 만든다. 모든 인간의 삶은 사실 거대한 예술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콘탁트호프'는 남성과 여성의 상대방을 향한 질문과 대답은 젊었을 적에나 늙은 후에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보름달'은 거대한 자연과 그 안에 일부이자 전체로 살아가는 인간의 관계를 역동성과 고요함의 반복적 흐름 안에서 보여준다.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중간 중간 삽입되는 개개인의 춤사위였다. 수영장에서, 도로에서, 삭막한 공장의 대지위에서 펼쳐지는 춤사위는 예술이 일상과 분리된 이질적인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피나 바우쉬는 예술이 삶과 공존하는 곳에서 그 진정한 힘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예술가였다. 그렇기에 예술이 지니는 그 허례허식적 측면을 무시한채 오로지 자신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길이기도 하였다. 삶과 일치된 예술은 보는 이를 그 안에 참여하는 인물로 변화시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언어에 묶여서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우리 안의 상처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점차 깨달아간다. 마치 처음으로 언어를 배우는 아이처럼.





  무용수들의 춤은 결코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은 아름답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저 '삶'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다.  있는 그대로 그러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몸짓은 그래서  아름답다기보다는 처절하고 숭고하다.  마치 무한하면서 닫혀 있는 우주처럼 그들의 춤사위를 펼치는 공간은 일상의 서사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현장인 동시에 실존적이고 비극적인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장소들이다. 차들이 무표정한 속도로 지나가는 저 익숙한 공간이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이러한 이중성의 공존을 가능케하는  춤의 힘이 있기 때문이리라.


 삶의 본질을 너무나도 일찍 꿰둟어본 탓일까. 피나바우쉬는 영화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이 삶의 굴레를  벗고 홀연히 우리들 곁을 떠났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오직 스크린 속 또다른 스크린에서만 그녀를 보여준다.  마치 내가 공존할 수 있는 저 스크린 속 무대에서조차 그녀를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추구한 예술은 결코 대중과 분리된 저 높은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무대위로 올리고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아름다움과 추악함 그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그녀의 춤을 삶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춤은 우리들의 삶이 언제나 아름다울 수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위대한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래서 영화 속 등장하는 무심코 코를 긁는 듯한 동작조차 하나하나가 진지하고 진솔하게 다가온다.  삶을 예술로 이끌고 예술로 하여금 다시금 삶을 말하게 하는 그녀의 춤. 영화는 일평생 '몸의 언어'를 추구한 피나 바우쉬를 존중하듯 대사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불필요한 주석을 첨가하지 않은 채 영화는 담백하게 피나바우쉬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몸의 언어를 자극한 탓일까, 아직까지 무용수들의 숨소리가 내 심장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