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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Philosophy

<영화>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드라마, 스릴러, 서스펜스 영국,미국 112분 2012.07.26 개봉

감독 린램지

출연 틸다스윈튼(에바) 이즈라 밀러(케빈) 존C.레일리(프랭클린) 


 화면을 붉은 색이 채운다. 시시각각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붉은 색은 끊임없는 불안감과 위태로움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토마토 축제를 즐기는 에바의 추억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열정과 뜨거움의 붉은색이 이제는 어느새 증오와 불안의 붉은색으로 변해있다. 인생은 이렇게 언제나 전복될 수 있는 가벼운 것이다.


 에바의 시점으로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기억의 짜맞춤 속에서 마침내 조각 조각 분리된 내용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기승전결에 따르는 결과가 아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의 결론에 이르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사건의 연속이듯 영화 역시 순간 순간의 사건들을 통해 에바와 케빈의 관계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스스로 말을 걸게 만든다.


에바는 준비된 엄마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엄마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생명의 잉태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 뜻대로 주어지지 않는 이 임신이라는 사건이 에바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에바는 어쩌면 스스로 임신과 육아에 관한 강한 부정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임신한 순간 에바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체념했다. 그러나 강한 책임감만은 그녀도 어찌할 수 없었나보다. 에바는 사랑보다 책임감이 앞서 케빈을 키운다.


에바는 나름 열심히 '엄마역할'을 해냈다. 공놀이를 하고 숫자공부를 시키고 아플때는 옆에서 지켜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이의 저항이 이미 아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에바에게는 너무나도 강하게 다가왔고 이를 어릴때부터 눈치챈 똑똑한 아이 역시 엄마의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큰 상실감에 부딪혔을 것이다.


 엄마역할과 아들노릇이라는 형식적인 관계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압도하는 순간 관계에는 숨길 수 없는 골이 드러난다. 어쩌면 이들은 너무나도 솔직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근대적 가족관계란 것이 일정한 역할놀이를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케빈은 남들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고 가족끼리 외식을 하며 함께 학교생활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전형적이고 문제될 것 없는 사건들에 분노외 회의감을 느꼈다. 케빈은 근대적 사회구조에 편입되기에는 너무 섬세하고 똑똑한 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순식간에 악마가 되었다. 사회악을 제거하고자하는 로빈후드의 정의감은 사람들을 죽이는 대학살이 되어버렸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케빈이 겨냥한 화살이 근대적 사회구조의 산물인 '학교'와 '집'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옥'을 가게되었다. 케빈은 책임감과 형식으로 점철된 이 삶을 구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왜곡된 저항감과 분노심이 유아기적인 단계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케빈이 일으킨 이 대참사가 과연 에바의 책임뿐일까. 에바는 자신의 엄마로서 해야할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평생 안고가야할 짐을 떠안게 되었다.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자유는 외로움으로 바뀐채로.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이유가 나중에 늙어서 사회적 위치를 상실하였을떄 다시 돌아갈 곳을 만들기 위해서아닐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노년의 시기에 자신의 외로움을 의지할 누군가를 만들기 위해 가족애와 책임감으로 무장한 보험. 


보험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너무 건조한 측면이 있지만 우리는 한번쯤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한다. 그것이 목적성이 존재하지 않는 당연한 것인지 아니면 종족 보존을 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지. 적어도 에바와 케빈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이를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한 두 인물이었다. 그러나 에바도 애를 낳은 순간부터는 이 근대가 부여한 엄마로서의 책임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이 두사람의 어긋난 욕망이 다이너마이트처럼 큰 결과를 낳았지만 그것이 과연 이 두 사람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악마는 케빈이 아니라 이러한 케빈을 만든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부조리한 구조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여전히 이 사회에서 케빈은 잔혹한 일을 저지른 범죄자에 불과할 뿐이지만.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끊임없이 시각적 청각적 장치들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감정 그리고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한다. 붉은색 사이렌스와 질서정연하게 나열된 캠벨수프 그리고 에바가 입고 있는 붉은 옷과 집에 칠해진 붉은 페인트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통일시키면서도 때에 따라 다른 상징성을 부여하면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이끌어내고 있고 화목해보이는 가족의 모습 기저에 깔린 왠지모를 불안감을 배경음악과 배우들의 표정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나 동공에 반사된 과녁판은 독특한 시점을 취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복사기의 스캔하는 소리와 같은 미세한 소리를 크게 확대하여 일상 삶에서 놓칠 수 있는 소리들을 쉽게 캐치하여 보는인의 민감한 자극을 깨우는 것들은 이 작품의 큰 주제와 맞물려서 우리가 당연시되는 것들을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촉매제가된다. 영화는 스토리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총체적인 감각으로 제시할때 진정 영화다워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영화가 제공하는 주제 뿐만 아니라 '영화다움'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